독일 국회의원인 마가레테 바우제는 온라인 거짓 정보에 4년 넘게 시달려왔다. 한 남성이 페이스북에서 이민 문제에 대한 그녀의 발언을 왜곡해 퍼트렸기 때문이다. 지난 3월, 이 남성의 집에 경찰이 찾아왔다. 이 사람은 독일 사정당국으로부터 벌금형을 통보받았다. 벌금은 1,400유로(한화 약 200만원)였다. 뉴욕 타임스는 지난 9월 23일 ‘온라인 혐오 발언으로 경찰이 방문할 수 있는 곳’(Where Online Hate Speech Can Bring the Police to Your Door)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A4 용
지난 7월 23일, 야나 파샤예바 로이터 통신 피디를 화상 중계를 통해 만났다. 윤세영 저널리즘 스쿨 특강에서였다. 그는 모스크바 국립 대학에서 언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러시아 경제지 코메르산트 라디오국과 슬레이트 매거진에서 경력을 쌓았다. 지난해 12월부터는 로이터 통신 모스크바 지부에서 비디오 프로듀서로 일한다. 정치, 사회, 우크라이나 사태 등의 속보와 기획 기사를 주로 다룬다. 유튜브 구독자 233만 명을 보유한 러시아의 언론인 이리나 시호만의 비디오 프로듀서이기도 하다. 유튜브 저널리즘은 언론 규제가 강한 러시아에서
“저는 우크라이나라는 아름다운 독립 국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더 아름다운 독립 국가인 우크라이나에서 성장해가길 희망합니다.” 한국에 있는 올랴 쉐스타코바 씨(28)의 러시아 침공 규탄 연설이다.기자는 3월 18일 저녁 6시 50분, 서울지하철 1호선 시청역에서 내려 덕수궁 돌담길을 지나 정동제일교회에 도착했다. 집회 장소인 교회는 주한 러시아 대사관 앞이었다.집회를 주최한 ‘우크라이나 평화행동’ 관계자가 촛불과 우크라이나의 평화를 지지하는 내용을 담은 스티커를 나눠줬다. 이 모임은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는 한국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일주일이 지난 3월 3일. 서울 중구 주한러시아 대사관 앞에서는 러시아를 규탄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대사관 앞 경비는 삼엄했고, 경찰 뒤로 보이는 대사관 문은 굳게 닫혔다.대사관 앞에는 우크라이나 국기를 상징하는 파란색과 노란색을 배경으로 만든 포스터를 들고 시민 10여 명이 시위를 했다. 포스터에는 ‘전쟁 반대’, ‘Stop War’ ‘Putin Out’ 같은 문구가 보였다.시위에 참여한 안중규 씨(61)는 “러시아의 행동이 도를 넘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러시아가 학교와 병원 같은 민간 시설을 공격
크로아티아는 1991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이후 정치 사회 경제 개혁에 집중하면서 여러 국가와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한국과는 1992년 수교했다.운영비 문제로 크로아티아는 주일 대사관이 한국 업무를 담당토록 했다. 2011년 박희태 당시 국회의장이 크로아티아를 방문했을 때, 양국 투자와 관광 교류 증대를 위해 대사관 상주를 요청하면서 2018년 주한 대사관의 문을 열었다. 대사관은 서울 중구 퇴계로에 있다.이웃 국가인 세르비아는 연방 유지를 원했다. 두 나라의 대립은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후 크
서울 종로구의 주한 핀란드 대사관을 10월 30일 찾았다. 뻬까 메쪼(Pekka Metso) 대사는 전날, 경북 안동에 다녀왔다. 그는 안동대에 가서 안동의 미래 산업과 녹색성장, 핀란드와의 교류 확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고 했다.한국은 지역 균형 발전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기자가 말하자 메쪼 대사는 공감했다. 핀란드는 수도 헬싱키가 크게 발전했지만 다른 지역도 비슷한 수준이 되도록 기반 시설을 발전시킨다고 했다.핀란드의 힘은 신뢰에서 나온다. 메쪼 대사에 따르면 국민 80%는 정부에 대한 신뢰가 높다. 자기가 내는 세금이 제대
미얀마 군사 쿠테타가 2월 1일 발생하고 200일이 넘었다. 미얀마 민주항쟁이 어떤 배경에서 시작되어 현재 상황까지 오게 됐는지 당사자의 증언을 통해 정리하는 영상을 제작하고자 했다. 항쟁의 큰 줄기에 대한 이야기를 미얀마인의 입을 통해 들어보자.
탈레반이 8월 15일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을 점령했다. 대통령은 외국으로 달아났다. 대전에 사는 미르와이스 씨(25)는 이 소식을 접하고 하루 종일 울었다. 이후에 하루 3시간도 잠을 자지 못했다. 기자와 만난 날에는 8월 23일 새벽에는 두 시간만 잤다고 했다.그는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카불의 가족이 페이스북으로 메시지를 보내기 때문이다. 가족이 걱정돼 아무 일도 못한다고 했다.미르와이스 씨는 3년 전 한국에 왔다. 사업을 하겠다는 꿈이 있었다. 지금은 바뀌었다. 가족과 외국에서 정착하기를 희망한다. 어느 나라든 상관없
미얀마의 군사 쿠테타 이후에 계속되는 시위는 1980년의 광주 민주화운동을 떠올리게 한다. 광주 오월 어머니회와 미얀마 청년이 만나 사진을 매개로 서로의 감정을 교류하고 과거와 현재를 기억하고자 한다. 같은 아픔을 가진 한국인으로서, 같은 역사를 공유하는 한국인으로서 미얀마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고 싶었다.
전남대 정문은 1980년 5월 18일, 학생 300여 명의 함성으로 뒤덮였다. 휴교령이 내려진 첫날이었다. 공수부대는 양쪽으로 10명씩 서서 정면을 응시했다. 뒤에는 M113 장갑차가 보였다.“밀어내!” 학생들이 학교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계엄군의 곤봉과 군홧발에 아수라장이 됐다. 학생들은 구호를 외치며 전남도청으로 향했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서막이었다.미얀마 양곤거리에는 2021년 2월 7일, 구슬픈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캔자스 밴드가 1977년에 발매한 ‘Dust in the wind’를 개사한 노래다.많은 시민이 세 손가락을
눈앞에서 시민이 죽는다. 누구는 분노를 느끼며 거리로 나가고 누구는 공포감에 사로잡혀 집에 남는다. 그들은 슬픔과 무력감을 느끼며 하루를 보낸다. 거리로 나간 이들의 목소리는 뉴스에 나오지만 집에 남은 이들의 이야기는 듣기 힘들었다.스토리오브서울 취재팀은 지인을 통해 미얀마 청년 8명을 소개받았다. SNS로 55일 동안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날은 인터뷰를 하는데 통화가 갑자기 끊겼다. 친척 집에 다녀오겠다던 취재원은 2주 동안 연락이 두절됐다. 그들은 매일 총소리를 듣는다고 말했다.미얀마 만달레이 중심부에 사는 또우다(23)는 4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4월 11일 오전, 서울지하철 3호선 옥수역 일대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졌다. 옥수역 근처에는 주한 미얀마 대사관의 무관부가 있다. 용산구 한남동의 미얀마 대사관과 별도로 군부 업무를 담당한다. 미얀마 민주주의 네트워크가 2월 초부터 근처에서 집회를 한다.현장에서 만난 미얀마인은 아무도 익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얼굴이 나온 사진을 사용해도 괜찮다고 했다. 위험하지 않으냐는 질문에 쩌탁(31)은 “미얀마에서는 아이들도 총 맞고 죽는다. 우리가 무서울 건
스토리오브서울 취재팀은 미얀마인을 찾아 페이스북으로 친구를 신청했다. 모르는 문자로 쪽지가 왔다. ‘안녕하세요’라는 뜻임을 나중에 알았다.미얀마 상황을 취재하기는 쉽지 않았다. 미얀마어는 네이버 번역 서비스(파파고)에서 지원하지 않는 언어다. 그러던 중, 미얀마의 만달레이 외국어대에서 한국어를 전공하는 학생 린과 연락이 닿았다.린은 인터뷰가 가능한 현지인을 소개하겠다고 말했다. 이후 취재팀과 주고받은 메신저를 캡처해서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렸다. 게시물이 4시간 만에 1000회 이상 공유되면서 미얀마 곳곳에서 연락이 왔다.미얀마를 살
주한 아프가니스탄 대사관을 방문하려고 5월에 메일을 보내고 전화를 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실망스러웠다. 이태원 발 코로나 확산으로 인터뷰가 불가능하다고 했다.대사관은 7월이 돼서야 취재를 허락했다. 방문하려던 날의 아침, 급한 일정으로 1주일 뒤에 가능하다고 했다. 결국 7월 28일 서울 용산구의 대사관을 찾았다.손님 대접은 아프가니스탄 문화에서 중요하다. 차를 하루에 여러 번 마시는 만큼 손님이 방문하면 항상 맛있는 차를 제공한다. 기자가 압둘 하킴 아타루드 대사를 기다릴 때, 직원이 차와 다과를 가져왔다. 아프가니스탄산 피스타치
아프가니스탄 인구의 63.6%가 25세 미만이다. 하킴 대사는 “젊은 아프가니스탄인은 누구보다 전쟁의 황폐화를 잘 알고 폭력에 침묵하지 않는다. 그들은 독립 라디오 방송국, 소셜 미디어 및 방송 토론을 통해 국민, 정부, 세계와 소통하고 있다”고 말했다.아프가니스탄 정부는 교육, 직업 훈련, 토론 그리고 지역 네트워크를 통해 청소년의 정치 참여를 장려한다. 모하마드 아쉬라프 가니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은 2018년 8월 전국 청소년 의회를 개최했다. 주마다 세 명의 젊은이로 구성돼 정책과 개발을 논의하는 단체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대방로의 인도네시아 대사관에서 우마르 하디 인도네시아 대사를 만났다. 작년 12월 26일이었다. 대사관은 작은 인도네시아였다. 인도네시아의 원목조각과 그릇, 전통 악기가 1층에 가득했다.하디 대사는 “최근 5년 간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교류가 최대치를 경신했다”고 말했다. 양국 교역액은 200억 달러 수준. 최근 아세안 포럼에서 양국은 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CEPA)을 타결했다. 하디 대사는 “역사적으로 한국과 인도네시아는 같은 궤적을 밟았다”고 말했다. 한국 광복절은 8월 15일, 인도네시
에티오피아인은 커피를 하루 세 번 마신다. 첫 잔에는 우애, 두 번째 잔에는 평화, 마지막 잔에는 축복을 담는다고 한다. 한국인이 밥을 함께 하며 이야기를 나누듯, 에티오피아인은 커피 한잔에 삶의 의미를 담아 인생을 이야기한다. ‘커피 세레모니’라는 고유의 문화다.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의 주한에티오피아 대사관을 찾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살람.’ 취재팀이 에티오피아 인사말을 건네며 회의실로 들어섰다. 쉬페로 시구테 대사는 악수를 청했다. 커피를 마시며 인터뷰를 했음은 물론이다. 회의실을 둘러보니 벽에 아비
네팔은 중국과 인도 중간의 내륙 국가다. 한국과 수교한 지는 올해로 45주년이 됐다. 양국관계를 취재하고 싶어 메일을 열 번 이상 보냈더니 답이 왔다. “우리 대사관을 방문하는 것을 열렬히 환영합니다.”대사관은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 있다. 대사가 퇴직하여 새로운 대사를 기다리는 중이라 람 싱 타빠(Ram SinghThapa) 임시 대리대사와 성엄 커트리(Sangam Khatree) 주재관이 기자를 만났다. 네팔과 한국은 우정과 친선, 상호협력이 두텁다. 람 대리대사는 네팔이 어려웠을 때 한국으로부터 많은
국토의 절반은 숲, 그리고 하얀 모래로 가득한 해변이다. 16, 17세기 건물이 여전히 많은 곳. 라트비아의 풍경이다.라트비아는 북유럽 발트해의 동쪽에 있다.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와 함께 발트 3국. 주한 대사관은 2015년 생겼다. 발트 3국 중에서 처음이다. 한국도 라트비아 수도 리가에 대사관을 올해 개설할 계획이다.주한 라트비아 대사관은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있다. 한적한 주택가 사이로 붉은 색 깃발 하나가 눈에 띄었다. 라트비아 국기였다. 페테리스 바이바르스 대사가 기자 일행을 만났다.바이바르스 대사는 “지금까지 양국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