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유진 한국독립애니메이션협회 사무국장
한 시간 가량의 씨앗 설명회가 끝나고 한국독립애니메이션협회 사무국장 최유진씨를 만났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저녁, 남산의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야외 벤치에서 나눈 대화는 가을처럼 푸르고 시원했다. 이제 막 심은 씨앗이 앞으로 어떤 모습의 싹을 틔울지 기대되기 시작했다.
척박한 땅에 씨앗을 뿌리다
독립애니메이션을 전문으로 배급하는 배급사가 국내에 전무한 상황에서 애니메이션이 제 빛을 발하지 못하고 사장되는 것을 막기 위해 2010년부터 한국독립애니메이션협회는 배급사업을 시작했다. 씨앗 설명회에서 배급팀은 “감독들이 어렵게 만든 애니메이션을 제대로 배급하지 못하고 개인 블로그 등에 그냥 올려버리는 일이 많다”며 “수익성을 내기보단 열악한 상황에서 작품을 만드는 감독들과 그 작품을 돕기 위해 사업을 시작했다”고 그 목적을 밝혔다. 배급 사업은 간단한 저작권 문제 확인과 서류작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감독이 직접 작품의 배급을 신청하면 한국독립애니메이션협회가 여러 곳에 작품을 배급한다. 이 과정에서 수익분배는 감독이 8, 배급사가 2로 이루어지며(국내, 한국독립애니메이션협회 회원 기준) 이는 타 배급사에 비해 감독의 수익이 훨씬 더 큰 파격적인 조건이다.
독립애니메이션이 널리 배급되지 않는 이유는 그것 ‘일반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독립애니메이션의 장점인 뚜렷한 개성은 대중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다. 최유진 사무국장은 “사람들이 독립애니메이션을 자주 접하게 되면 독립애니메이션을 보는 눈이 생길 것”이라며 “그러면 자연스럽게 대중성은 생긴다”고 말했다. “대중성에 특정한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야한 것이 대중적이라거나 웃긴 것이 대중적이라고 정의내릴 수는 없는 거니까요. 결국은 대중들과 어떻게, 얼마만큼 소통할 수 있느냐가 포인트죠.” 그런데 독립애니메이션의 경우 관객들과 마주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다. “접할 기회가 없으면 시각이 생기지 않아요. 독립애니메이션이 사람들에게 더 많이 보여 진다면 ‘아, 이건 이런 거구나, 이렇게 보는 거구나’라는 느낌이 자연스럽게 생길 거예요. 하지만 독립애니메이션에 전혀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은 ‘왜 배가 하늘로 다니지? 어떻게 사람이 날지?’라며 의문을 제시하겠죠.” 그는 “어렵다고 말하는 것은 독립애니메이션의 언어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대형멀티플렉스가 장악하고 있는 한국의 대중들은 상업성의 논리에서 벗어난 독립애니메이션을 접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문제점을 지적했다.
따뜻한 햇살과 꿀 같은 단비
제 7회 인디애니페스트의 제목은 ‘칠’이다. ‘칠’은 7회를 기념한 숫자 ‘7’과 함께 ‘우리에게 벽이 있다면 새롭게 칠하겠어. 색색의 무지갯빛으로 채우고 희망을 얘기할거야’(인디애니페스트 공식 사이트 http://www.ianifest.org/ 출처)라는 의미를 담았다. 독립애니메이션에 대한 여러 가지 이미지에 칠을 한다면 어떤 느낌을 더하고 싶은지 물었다. “독립애니메이션이 어려운 점도 있지만 누가 봐도 이해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작품들도 많이 늘어났어요. 권위로 가득차기 보다는 편안하고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젊고 신선한 느낌을 주었으면 합니다.”
그는 행운의 숫자 ‘7’이 “예산 확보”라는 행운을 가져다주길 바란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주어지는 예산이 크게 줄었는데 행사의 규모는 줄이지 않고 오히려 이벤트를 더 늘려서 진행했다. “예산이 너무 적어서 거의 자부담으로 행사를 진행했어요. 감독님도 무료로 참여하시고, 파티라도 하려면 회비를 걷어야 해요. 감독님들이 영화제 기간 동안만이라도 경제적 요소에 구애받지 않고 즐기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직접 기계들을 설치하고 발로 뛰며 축제에 참여하는 감독들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고 싶다는 최유진 사무국장은 “그래도 행복하면 이기는 거라고 생각하니까 즐겁게 하려고 합니다!”라며 밝게 미소 지었다.
아름드리나무가 될 수 있도록
최유진 사무국장은 “많은 사람들이 독립애니메이션의 수익성과 상업성을 기대하지만 아직 수익성이 날만한 토양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며 “기관에서는 당장의 수익을 무리하게 요구하지 말고, 조금 더 장기적인 시각에서 지원을 해주었으면 한다”고 의견을 밝혔다. “독립애니메이션을 하나의 문화, 예술로 보면서 장기적인 노력을 한다면 독립애니메이션을 통해서도 먹고 살 수 있는 다양한 모델이 만들어질 거예요.”
지금은 터가 없다.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오히려 가능성은 무궁무진하고 무언가를 하면 새로운 것이 된다. 그는 “ <마당을 나온 암탉>이 새로운 신화를 썼지만 수익분기점을 조금 넘어선 수준”이라며 “이제 시작”이라고 말했다. “기존의 독립애니메이션은 기획력이나 창작성이 약하다는 평을 종종 들어왔어요. 하지만 최근의 한국독립애니메이션들을 보면 퀄리티도 높고 다방면에서 뒤떨어지지 않아요. 이제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기존의 것을 뛰어넘는 작품들이 계속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한 기회를 만드는 것이 한국독립애니메이션협회의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최유진 사무국장은 모바일, IPTV 등 다양한 플랫폼을 모색 중이다. “재밌는 플랫폼을 많이 생각해보고 싶어요. QR코드 영화제 같은 완전히 새로운 통로요. 어디를 가든 독립애니메이션을 손쉽게 접할 수 있는 그런 환경을 만들고 싶어요. 쉽진 않겠지만 너무 성급하지 않게 천천히 한 단계씩 이뤄가고자 합니다.”
독립애니메이션 감독을 꿈꾸는 20대 학생들에게는 “20대는 젊으니까 해보고 싶은 일이라면 한번 쯤 도전 해봐도 괜찮지 않겠냐”며 “실제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부분도 있고 해결해야할 문제가 많지만 하고 싶은 일에 뛰어들어보는 사람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갈 수 있다”고 조언했다. 또한 “애니메이션 작업 자체는 혼자 하는 것이지만 모임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과 만났으면 좋겠다”며 “함께 밥도 먹고 격려해주고 칭찬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말도 전했다.
한국독립애니메이션은 계속 성장하고 있다. “독립애니메이션이라는 말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 이제 겨우 10년이에요. 감독이나 관객층이 두터워진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새로운 창작자와 새로운 관객으로 한국독립애니메이션계를 이끌어나가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싹이 틀 수 있을지를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봐야 하는 척박한 토지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꾸준히 빛과 거름을 주고 있기에 씨앗은 아름드리나무로 성장할 수 있다.